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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 선량한 차별주의자 (김지혜) 리뷰

기로송 2024. 1. 18. 1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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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량한 차별주의자
은밀하고 사소하며 일상적이고 자연스럽게 벌어지는 일들 속에서 선량한 우리가 놓치고 있던 차별과 혐오의 순간을 날카롭게 포착하는 『선량한 차별주의자』. 차별의 사각지대에 놓인 이들을 직접 찾아가는 현장 활동가이자, 통계학·사회복지학·법학을 넘나드는 통합적인 시각을 바탕으로 국내의 열악한 혐오·차별 문제의 이론적 토대를 구축하는 데 전념해온 연구자인 김지혜 교수가 인간 심리에 대한 국내외의 최신 연구, 현장에서 기록한 생생한 사례, 학생들과 꾸준히 진행해온 토론수업과 전문가들의 학술포럼에서의 다양한 논쟁을 버무려 우리 일상에 숨겨진 혐오와 차별의 순간들을 생생하게 담아냈다. 1부에서는 우리가 차별을 보지 못하고 선량한 차별주의자가 되는 이유를 중점적으로 다룬다. 모든 사람은 가진 조건이 다르기에, 각자의 위치에서 아무리 공정하게 판단하려 한들 편향될 수밖에 없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우리가 보지 못하는 차별을 알아채기 위해서는 자신이 가진 특권을 발견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저자의 날카롭고 다각적인 문제제기를 따라가다 보면, 아무리 선량한 시민이라도 차별을 전혀 하지 않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2부에서는 다양한 사례를 통해 차별이 지워지거나 공정함으로 둔갑되는 메커니즘을 살핀다. 저자는 차별에 대한 논란들을 차근차근 해부하며 역으로 질문을 던지고, 인간 심리와 사회현상에 대한 다양한 연구와 이론을 소개하면서 독자가 자연스럽게 평등과 차별을 탐구해볼 수 있게 한다. 3부에서는 차별과 혐오에 대응하는 우리의 자세를 살핀다. 각종 논쟁과 실험을 풍부하게 제시하며, 지금 당장 시작할 수 있는 한걸음의 대안부터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까지 폭넓게 살펴본다.
저자
김지혜
출판
창비
출판일
2019.07.17

 

 

선량한 차별주의자?

우리는 스스로 선량한 시민일 뿐 차별을 하지 않는다고 믿는 '선량한 차별주의자'들을 곳곳에서 만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차별을 안한다고 믿고, 하지 않으려 하지만 자신이 내는 차별의 언어와 행동을 인지하지 못한다. 

개괄식 정리

저자는 감사하게도 여는글에 앞으로 전개될 이 책의 내용에 대해 간략히 설명해 준다. 

1부 어떻게 선량한 차별주의자가 만들어지는지 

- 우리의 일상생활에서의 익숙한 특권으로 인해 불평등이 보이지 않는 착시 

- 유동적이고 서로 교차하는 경계로 구분된 집단에 따라 서로 차별을 주고 받는 현상에 대해

- 구조적 차별에 둘러싸인 사회가 어떻게 불평등을 유지하는지. 

2부 차별이 어떻게 지워지는지, 어떻게 정당한 차별로 위장되는지.

- 누군가를 비하하는 농담의 효과 

- 비정규직에 대한 차별은 공정하다고 생각하는 능력주의 신념

- 누군가를 배제하고 분리하면서 이를 정당화하는 현상

- 가시화된 소수자를 대하는 태도와 공공의 공간은 누구의 것인가?


3부 차별에 대응하는 우리의 자세 

- 차별에 도전하는 노력들이 기존사회 질서에 대한 위협으로 느껴지는 긴장

- 모두를 위한 화자일, 다양한 모든 사람을 포괄하는 과정으로써의 평등

- 평등을 실현하는 해법의 하나인 차별금지법 제정

 

인상적인 구절

 능력주의는 누구나 능력있고 열심히 하면 성공한다는 믿음이다
누구든지 노력과 능력으로써 높은 지위에 올라갈 수 있다고 믿기 때문에 
사회적 지위가 낮은 책임은 최선을 다하지 않은 개인에게 있다고 생각한다. 


- 능력주의는 허울은 좋아보이지만, 결국 구조적인 문제를 개인에게 돌리는 사상이다. 

 

어떤 손님이 예의를 지키지 않는다는 이유로 아예 특정 '집단'을 거부해도 괜찮은걸까? 
....
왜 어떤 집단은 특별히 잘못이 없어도 거부되는데, 어떤 집단은 개별적으로만
문제 삼고 집단으로는 문제 삼지 않을까?

 

'보통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광장이나 공원이나 거리는 
'퀴어'가 있을 자리가 아니라고 말한다.
그럼 퀴어의 자리는 어디인가?

 

그렇기에 역으로 성소수자가 축제와 커밍아웃을 하는 이유가 더 분명해진다. 
보이지 않는 성소수자에게 축제와 커밍아웃은, 보이는 존재로서 평등한 세계에 입장하고
민주적인 토론에 참여하기 위해 낙인이 찍혀있는 사적 기표를 공공의 장에 노출하는 행위다.
.. 어떤 사적 특성이 공공의 장소에서 받아들여지는가?
공공 공간의 주인은 누구인가?
공공 공간에 입장할 자격은 누가 정하고 통제하는가?

 

우리는 종종 피해자를 먼저 의심한다. 차별에서도 마찬가지다. 

 

최소한 내가 배척당할까 두려워 다른 누군가를 비웃고 놀리고 짓밟는 일이 없도록,
넉넉하게 모두를 품는 안전한 사회를 만들기를 꿈꾼다.  

 

찝찝한 기분이 드는 현실

 

내 인문학적 소양의 부족으로 너무 안 읽혀서 혼났다. 작년부터 읽으려고 노력했는데 결국 올해 읽어낸(?) 책이 되었다. 

다 읽어낸 지금 시원한게 아니라 오히려 볼일을 덜 본듯한 찝찝한 기분이 드는 이유는 뭘까? 

책에 나온 차별의 사례들을 굳이 들지 않더라도 우리는 이미 일상생활에서 많은 차별들을 행하기도 하고 때론 당하기도 하는 입장이지 않나 하고 생각했다. 또, 그렇게 차별을 행하는 이유는 결국 차별을 당하는 입장에 처해보지 않아서가 아닐까라는 생각도. 

 

최근 이슈가 되고 있는 장애인차별금지연대의 지하철 시위를 보면,  왜 그들이 그렇게까지 하는지에 대한 사회적인 고민이나 시선은 전혀 느껴지지 않고 단지 나에게 피해가 된다는 이유로 비난부터 쏟아내는 것을 볼 수 있다. 선척적 장애는 차치하고서라도 후천적 장애는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다. 다만, 내가 운이 좋아서 지금까지 장애가 일어나지 않은 것뿐이다. 악담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지 않은가? 그리고, 꼭 사고나 어떤 병으로 인해서 일어나지 않더라도 언젠가 우린 늙고 병들어 장애를 가지게 될 수 도 있다. 그때 지하철에 있는 엘리베이터를 꼭 타야만 지하철을 탈 수 있을 때, 그냥 버스가 아닌 저상버스를 꼭 타야 할 때, 그냥 택시가 아닌 장애인용 택시만 탈 수 있을 때. 이렇게 한번 이동할 때 너무나 많은 제약으로 인해 이동하는 것이 어렵게 된다면 어떨까? 이미 많은 일상생활에서 당연하게 영위할 수 있는 것들이 사실은 권리가 아니라 권력이었다는 것을 그때야 깨닫게 되지 않을까? (그들이 시위하는 이유가 비단 장애인 이동권만을 보장해달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몇 가지 기사만 찾아봐도 알 수 있다. 굳이 여기에 쓰지는 않겠다.)

 

위와 같이 이해가 되고 함께 공감하고 연대해야할 것 같은 사례도 있었지만, 또 어떤 사례는 좀 더 생각하고 고민할 거리들을 던져주기도 했다. 바로 어떤 누군가를 사적영역에 못 들이게 하는 노ㅇㅇ존 이야기이다. 외국의 사례 중 인종으로 구별한다거나 우리나라의 사례 중 외국인 출입금지등의 이야기들은 그나마 이제 명백한 차별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사회적으로 합의의 분위기가 있지만, (물론 우리나라는 법적으로 제재할 방법은 없다고 한다.) 최근 우리나라에서는 노키즈존이 이슈가 되었는데 노키즈존을 시행하는 업장들은 또 그만의 이유들이 있었다. 아이들이 업장에서 뛰어다니다가 발생하는 사고로 인해 업장의 주인이 법적으로 벌금을 내고 어쩔 수 없이 노키즈존으로 운영하게 되었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머리로는 당연히 분명한 차별이라고 느끼지만 그걸 제재할 수 있는 방법이 없고 손해가 된다면 시행을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업장의 입장이었다. 그때 당시 기사를 보고 느낀 건 아이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아이들과 대동한 부모들이 문제라고 느꼈다. 아이를 제재해야 하는 건 부모의 몫인데 오히려 부모는 오히려 아이가 아닌 업장의 문제로 돌리며 적반하장으로 나왔다는 것이었다.  단순하게 차별을 하지 말아야겠다로 끝나는 것이 아닌 업장의 주인을 지킬 수 있는 법적인 제재가 필요하진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저자는 외국의 사례들과 우리나라의 사례들을 알아보며 차별이 어떻게 생겨나고 그 차별들은 어떻게 사회 곳곳에 침투해 있는지 계속 관찰해볼수 있도록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고 궁극적으로는 이 모든 차별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은 차별금지법을 입법해 시행하는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과연 차별금지법이 시행될 수 있을까? 차별금지법의 시행을 막는 대표적인 주체는 기독교 세력인데 길을 지나다 밟히는 게 교회 십자가인 이 나라에서 과연 시행이 가능할까 하는 의문이 먼저 들었다. 

 

책에서 이야기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많은 기사를 통해 이미 혐오와 차별의 시대를 살고 있다는것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다.

차별금지법이 노회찬 의원의 대표발의로 처음 발의된것이 2007년. 그리고 재차 발의되었지만 동성애를 문제 삼아 기독교단체의 반발로 꾸준히 무산되고 있다. 유엔의 권고, 국가인권위원회의 권고에도 말이다. 무엇이 그들을 그렇게 두렵게 하는 것일까? 

 

아마 이책을 다 읽고 나서도 시원한 게 아니라 찝찝하게 느껴지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 아니였을까 자문해 본다.

 

저자는 마지막 에필로그에서 영화 우리들의 이야기를 한다. 개인적으로 우리들을 재밌게 본 입장으로 이런 생각이 들었다. 생각해 보면 우리는 어린 시절 누군가를 소외시키기도 하고, 낙인을 찍기도 하며, 반 구성원의 보편에 들어가기 위해 엄청난 노력들을 하곤 한다. 누군 어디 산다더라, 누군 어떤 차를 타고 다닌다더라 하며 같이 놀기도 하고 때론 따돌리기도 했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따돌리지 않았다며 자위하기도 했을것이다. 결국엔 그 조그만 사회 같은 학교의 구성원인 아이들이 그런 차별의 행동 혹은 혐오의 언어를 누구에게 배웠을까? 하고 생각했을 때 그 아이들의 부모로부터 시작되지는 않았을까 하는 조심스러운 생각. 그 부모 역시 그들의 부모 또 그들의 부모, 마지막 가장 상위에는 사회적인 분위기로부터 이렇게 세습되어 내려오며 우리의 차별과 혐오를 키워오진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사회 구조적인 문제가 아니었을까. 또, 학교에서 수학 영어도 너무 중요한 과목이겠지만 인권을 학문으로 배우는 수업을 과정에 넣어야 하진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을 읽고 아 나는 그렇지 않아라고 생각할 수도 있고 이게 차별이야? 하지만 그럴수 밖에 없잖아?! 라고 생각할수도 있다. 하지만 한 번쯤 나의 언어, 행동들을 돌아보는 기회라도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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